연구노트 (15) '나의 것'을 찾는다는 것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선생님, 박사논문이란 무엇인가요,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통해, 꼼꼼히 글을 써서,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만든다는 것. 그 세계 안에는 수많은 생명과 죽음과 질서와 무질서와 절제와 탐욕과 숭고한 희생과 무자비한 학살이 담겨있을 터였다. 난 그런 세계를 만들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사료를 깊이 파고, 또 파고들었다. 어느새 박사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사료 속 세계를 맴돌았다.

논문의 초고를 선생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때가 다가오면서, 마음 속 절박함과 조급함은 더욱 심해졌다. 내 앞에 놓인 이 불안정한 세계를 선생님께 꺼내어 놓는 일이 두려웠다.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할 때와는 다른, 거대한 압박과 묘한 흥분이 나를 지배했다.

그래, 압박과 흥분이 동시에 존속하는 감각은 기묘했다. 나는 수많은 두려움에 둘러쌓여 있되, 그 누구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던 세계를, 작은 벽돌들을 빚어 하나씩 쌓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 두려움과 기쁨은 복이 많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임을 잘 알기에,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힘껏 들이마셨다.

나는 머지 않아 두 가지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1. 아무도 나의 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2. 나의 글은 여러 지점에서 명백히 비판받는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낫다, 관심이 없다면 비판도 없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내 글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그런 연구가 있대, 정도로 넘어가는 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떨림은 그 두 가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한 세계만을 생각하며 쓴 글이, 그 글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을 잘 대변하고 있는 글인 걸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내 무지와 오해로 인해 그들을 뒤틀어버리는 건 아닐까. 무서웠고, 무섭다. 단행본 분량의 글을 낸다는 건 이런 무서움이 뒤따르는 일인 걸까. 어쩌면 이런 생각 자체가 일종의 특권의식인 건가. 혼란과 혼돈의 글쓰기.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선생님께 열심히 혼나면서, 동시에 나의 세계를 정밀하게 구축하는 일은, 그 혼돈의 감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나의 것’이라 부를 만한 글도, 세계도 없다. 결코 단박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 연구자 중 ‘젊은 천재’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의 세계’는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사료를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빚어진다. 작은 벽돌을 가지런히 쌓고, 돌출된 부분을 정밀하게 깎고, 벽돌 사이를 꼼꼼하게 잇는, 그 모든 과정은 천재적인 두뇌로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둔재인 나는 더더욱 사료를 더 많이 더 깊게 보면서 글을 써야 한다. 책상과 책장과 컴퓨터에 쌓여 있는 사료가 내 앞에 있다. 그 사료 안에는 많은 목소리가 담겨 있지만, 찾아준 이는 많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꺼내어 보이고 싶다. 주목받지 못했던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아늑한 안식처로서의 세계를 더욱 치열하게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세계에 살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