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노트 (18) 시작

문이 있었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보려 했다. 손잡이는 돌아가는데 너무나 무거워 아무리 밀어도 꼼짝도 않는다. 잠시 쉬면서 힘을 채웠다. 다시 힘껏 밀어도 빈틈 없는 너.

가만히 생각했다. 이 문은 무얼까. 나는 왜 여기에 서서 답답한 마음을 삭히고 견디는 걸까. 혹 문을 연다면 그 다음은 무얼까. 아무 답변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은 공허하다. 그저 잠시 쉬고 다시 힘껏 밀어볼 뿐.

굳은 문 사이를 비집고 작은 줄기의 빛이 새어나왔다. 열린다, 이게 열리긴 하는구나. 힘을 다해 밀었다. 외려 닫히는 문. 아니야, 아직은 힘이 부족하다. 힘을 기르자. 걷고 뛰며 나를 담금질했다. 힘을 다해 밀었다. 아직도 아니야.

때가 무르익었다는 느낌이 아무 예고도 없이 다가왔다. 아마 열리지 않을까. 이제껏 문만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녕이구나. 내가 누워 납작하게 낮아진 풀에게도 인사한다. 그 부드럽고 따뜻함에 감사하며, 안녕하길.

문의 무게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너무나 버거운 몸과 마음. 기력은 낮아지는데 굵어지는 빛줄기가 나를 휘감았다. 고통과 희열이 끊임없이 마주하는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계속 나아갔다. 왼발, 오른발.

얼마나 지났는지 모든 마찰이 일순간 사라졌다. 눈을 떴다. 나는 문 너머에 있었다. 그토록 넘고 싶어한 문, 그 바로 뒤에 섰다. 땀투성이의 나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문을 쓰다듬었다. 문조차도 그대로였다.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무엇을 해낸 것인가. 눈앞의 문을 밀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빛이라는 희망에 취해 나는 나를 열심히 깎고 부수어 끝내는 그 문 뒤로 나와졌던 것 같다. 내 단심을 가상히 여겨 보내준 게 아닐까. 나는 나 이외에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한 것 같은데.

옅은 바람이 불어와 내 긴장을 달랬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힘을 기르려 무진 애를 썼고 문을 있는 힘껏 밀었고 결국 문 뒤에 섰다. 그래도 꽤 괜찮았어. 여전히 얼떨떨한 마음이지만.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힘이 제법 느껴진다. 그 고생을 하며 남은 거라곤 내 몸에 대한 정확한 감각. 나는 내가 어디까지 높이 닿을 수 있고 얼만큼 힘을 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달리고 싶고 달려야 할 때 어떻게 얼마나 빨리 달릴지도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나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선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