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노트 (16) 겸허한 파괴

문득 든 생각. 박사논문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하고 싶은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만의 주장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그 학위를 이미 받은 선학이 나를 자신의 동학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에 걸맞는 인간 형식(자세)과 학문 형식(논문)이 필요한 것이다.

겸손과 겸허를 다시 떠올린다. 열심히 글을 쓴 만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정은 쉽다. 몇 문장을 인용해서 칭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비판은 어렵다. 글을 쓴 사람과의 관계, 비판이 이루어져야 할 어설픈 대목의 탐색, 정당한 비판을 위한 궁리,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만큼 나와 내 글에 관심을 두고 보셨구나, 퍽 감사한 일이다.

인간 형식과 학문 형식에 있어 학위를 받을 만한 수양이 되어 있었기를. 언제 어디서든 냉철한 비판을 매정하다 여기지 않고 나와 글을 살펴주시는 마음으로 읽어야겠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데 있어 더 나은 길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지치지 말고 열심히 깎고 부수고 다듬을 일이다.